IRP에서 ETF만 운용하는 나에게 연금보험도 필요할까
TV 경제 프로그램을 보다가 연금보험 이야기가 나왔다.
최저보증형 연금보험, ETF 변액연금보험, 달러연금보험이라는 이름이 차례로 등장했다. 이름만 들으면 보험 자격시험 문제처럼 느껴진다. 노후 준비를 하려다가 단어 공부부터 해야 할 판이다.
평소 같으면 보험상품 광고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넘기지 못했다.
나는 일반 연금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별도의 연금저축계좌도 없다. 퇴직금은 IRP 계좌로 옮겨 ETF에 투자하고 있다. 퇴직 후에도 자산을 너무 일찍 움츠리지 말고 성장시키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이런 질문이 생겼다.
IRP에서 퇴직연금을 ETF로 운용하고 있는 나에게 별도의 연금보험도 필요할까?
ETF는 돈을 키우는 도구
내가 IRP에서 ETF에 투자하는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장기간 주식시장과 좋은 기업의 성장에 참여해 퇴직자산의 크기를 키우려는 것이다. ETF 가격이 하락하면 분배금을 다시 투자하고, 단기적인 시장 변동보다 긴 흐름을 보려고 한다.
쉽게 말하면 IRP의 ETF는 돈을 키우는 화분과 비슷하다.
좋은 씨앗을 심고 오랫동안 물을 주면 나무가 자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날씨가 나쁘면 잎이 떨어질 수도 있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장기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있지만 매년 꼬박꼬박 오르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노후에는 돈을 키우는 일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은퇴 후에는 전기요금, 식비, 건강보험료처럼 매달 생활비가 나간다. 이때 주식시장이 크게 하락하면 가격이 내려간 ETF를 팔아 생활비를 마련해야 할 수도 있다.
계좌는 장기투자를 외치는데 생활비는 매달 “이번 달 것도 부탁합니다”라고 찾아온다. 이 둘의 시간표가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연금보험이 눈에 들어온 이유
연금보험이 갑자기 좋아 보여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ETF는 자산을 키우는 데 유리하지만, 연금보험은 매달 일정한 생활비를 받는 구조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 수도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다.
IRP의 ETF는 물을 모아두는 커다란 저수지다. 시장이 좋으면 물이 많이 차지만, 시장이 나쁘면 수위가 낮아질 수 있다.
연금보험은 저수지의 크기를 키우기보다 매달 일정한 양의 물이 나오도록 수도꼭지를 설치하는 상품에 가깝다.
노후에는 저수지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매달 수도꼭지에서 얼마가 나오는지도 중요하다.
연금보험 세 종류
방송에서 소개된 연금보험은 크게 세 종류였다.
최저보증형 연금보험
최저보증형은 높은 수익보다 나중에 받을 연금의 최소 기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품이다.
시장 상황이 나빠도 약속한 조건을 지키면 일정한 기준에 따라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다. 안전운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동차와 비슷하다.
하지만 ‘보증’이라는 말만 보고 언제 해지해도 원금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보통은 오랜 기간 계약을 유지하고 정해진 나이부터 연금으로 받을 때 보증이 적용된다. 중간에 해지하면 내가 낸 돈보다 적은 금액을 돌려받을 수도 있다.
안전벨트가 있다고 자동차가 절대 사고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언제까지 보증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ETF 변액연금보험
ETF 변액연금보험은 내가 낸 보험료 일부를 ETF나 펀드에 투자한다.
투자가 잘되면 나중에 받을 연금이 늘어날 수 있지만, 시장이 하락하면 적립금도 줄어들 수 있다. 연금보험 안에 작은 투자계좌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역할이 겹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이미 IRP에서 ETF를 직접 고르고 투자하고 있다. 여기에 ETF 변액연금보험까지 가입하면 비슷한 자산에 두 번 투자할 수 있다. 보험 관리 비용까지 더해지면 구조만 복잡해질 수도 있다.
피자 두 판을 주문했다고 맛이 두 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토핑이 똑같다면 냉장고만 복잡해질 수 있다.
달러연금보험
달러연금보험은 보험료와 연금을 달러 기준으로 계산하는 상품이다.
원화 자산만 보유하지 않고 달러 자산도 함께 갖는다는 장점이 있다. 해외에서 생활하거나 달러로 돈을 쓸 계획이 있다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환율이 움직이면 내가 내는 돈과 받는 돈의 원화 가치도 달라진다.
달러 가치가 오르면 보험료를 낼 때 더 많은 원화가 필요할 수 있다. 반대로 연금을 받을 때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원화로 바꾼 금액이 줄어들 수 있다.
달러연금보험은 환율 위험을 없애는 상품이 아니다. 원화에만 돈을 두는 위험을 줄이는 대신 새로운 환율 위험을 받아들이는 상품이다.
연 7%의 진짜 의미
방송에서 가장 눈에 띈 숫자는 ‘연 7%’였다.
이 말을 들으면 내가 낸 보험료 전체가 매년 7%씩 불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 상품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연 7%가 내가 해지할 때 받는 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연금액을 계산하기 위한 별도의 기준금액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통장이 두 개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첫 번째는 내가 보험료를 내고 중간에 해지할 때 받을 돈을 계산하는 통장이다.
두 번째는 나중에 연금을 얼마나 줄지 계산하는 가상의 통장이다.
광고에서 말하는 7%가 두 번째 통장에 적용된다면, 첫 번째 통장의 실제 잔액은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연 7%’라는 큰 글씨보다 다음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
- 내가 낸 보험료 전체에 적용되는가
- 단리인가 복리인가
- 몇 년 동안 유지해야 하는가
- 중간에 해지하면 얼마를 받는가
- 실제로 매달 받는 연금은 얼마인가
큰 글씨는 눈길을 끌고, 작은 글씨는 돈이 빠져나간 뒤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연금저축과 연금보험
연금보험을 찾아보다 보면 연금저축이라는 말도 함께 나온다.
둘은 이름은 비슷하지만 세금 혜택을 받는 시점이 다르다.
연금저축은 돈을 넣는 동안 일정 조건에 따라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 연금계좌다. 증권사의 연금저축펀드에서는 ETF와 펀드에 투자할 수 있다.
반면 일반 연금보험은 납입할 때 연금저축처럼 세액공제를 받는 상품이 아니다. 일정 조건을 충족해 오래 유지하면 보험차익에 대한 비과세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나는 연금보험도 없고 별도의 연금저축계좌도 없다. 현재는 퇴직금을 이전한 IRP 계좌가 노후자산 운용의 중심이다.
따라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질문은 “연금상품을 하나 더 가입할까?”가 아니다.
현재 가진 국민연금과 IRP만으로 노후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가 먼저다.
ETF만으로 부족한 부분
ETF는 장기적인 자산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생활비를 꺼내 쓰기 시작하는 시점에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은퇴 직후 주식시장이 크게 하락했다고 생각해 보자.
생활비가 필요해 가격이 내려간 ETF를 계속 팔면 보유 수량이 줄어든다. 나중에 시장이 회복해도 회복에 참여할 자산이 부족할 수 있다.
이를 어려운 말로 ‘인출 순서 위험’이라고 한다. 이름은 어렵지만 뜻은 간단하다.
돈을 꺼내 쓰기 시작한 초기에 시장이 크게 떨어지면 노후자산이 예상보다 빨리 줄어들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IRP에서 ETF를 운용하더라도 생활비 1~2년분을 현금성 자산이나 변동성이 낮은 상품으로 따로 준비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연금보험만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다.
나에게 연금보험이 필요할까
현재까지의 생각은 이렇다.
ETF 변액연금보험은 이미 운용 중인 IRP의 ETF와 역할이 겹칠 가능성이 크다.
달러연금보험도 실제로 달러를 사용할 계획이 없다면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 단순히 달러가 오를 것 같다는 예상만으로 오랫동안 유지해야 하는 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최저보증형 연금보험은 매달 안정적인 생활비를 만든다는 점에서 IRP와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간 유지해야 하고 중도 해지 손실 가능성도 있다. 보증 조건과 비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는 서둘러 가입할 이유가 없다.
결국 연금보험이 필요한지는 상품의 이름보다 내 노후 생활비 구조에 달려 있다.
국민연금으로 기본 생활비의 상당 부분을 마련할 수 있고, IRP에서 분배금과 정기 인출로 부족한 금액을 채울 수 있다면 연금보험이 없어도 될 수 있다.
반대로 시장이 좋지 않을 때도 매달 일정한 금액을 반드시 받아야 마음이 편하다면 안정형 연금의 역할을 검토할 수 있다.
지금 먼저 할 일
방송을 본 뒤 연금보험 가입부터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가진 노후자산을 먼저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연금을 매달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은퇴 후 생활비는 얼마가 필요한지, IRP에서 매달 얼마를 꺼내야 하는지부터 계산해야 한다.
주식시장이 1~2년 부진해도 ETF를 급하게 팔지 않을 현금성 자산이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노후 준비는 통장을 많이 만드는 경쟁이 아니다.
국민연금은 기본 생활비, IRP의 ETF는 자산 성장, 현금성 자산은 시장 하락기의 생활비처럼 각 자산의 역할을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
자산 성장과 현금흐름
이번에 공부하면서 새롭게 이해한 것은 자산을 키우는 단계와 꺼내 쓰는 단계를 따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나는 IRP의 ETF 수익률과 자산 성장에 관심이 컸다. 앞으로는 시장이 좋지 않을 때도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현재로서는 연금보험에 바로 가입할 생각은 없다.
먼저 국민연금과 IRP, 현금성 자산을 연결해 매달 생활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계산해 볼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연금보험도 하나의 선택지로 검토할 수 있다.
계좌를 키우는 일만큼 잘 꺼내 쓰는 일도 중요하다.
씨앗을 심는 공부는 해왔으니, 이제는 언제 어떻게 수확할지도 공부할 차례다. 노후 준비 역시 농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공박사의 마르지 않는 샘
※ 이 글은 시장 흐름과 개인 계좌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남긴 투자 기록입니다. 특정 종목이나 금융상품의 매수·매도를 권유하는 글이 아니며 모든 투자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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